누나에게서 흥미로운 링크를 받았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NC State) 연구팀이 신호등에 네 번째 색, “하얀불(White Phase)“을 추가하자고 제안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첫 반응은 “머리로 와닿지 않는걸”이었습니다. 기사를 다 읽고 나서야 조금 감이 잡혔습니다. “신호등이 없는 상태를 정의하자는 거구나.”
그런데 감이 잡힌 지 몇 분도 안 돼서, 둘의 의견이 심하게 갈렸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필요 없다는 쪽이었고, 누나는 충분히 도입할 만하다는 쪽이었습니다.
White Phase가 실제로 하는 일
논문 제목은 “White Phase Intersection Control Through Distributed Coordination: A Mobile Controller Paradigm in a Mixed Traffic Stream”입니다. NC State의 Ramin Niroumand, Leila Hajibabai, Ali Hajbabaie가 썼고, IEEE Transactions on Intelligent Transportation Systems 2023년 3월호에 실렸습니다.
핵심은 신호등에 색 하나를 추가한 게 아닙니다. 교차로 통행 순서를 정하는 결정 주체를 고정된 인프라(신호 제어기)에서 차량들 쪽으로 옮기려는 시도입니다.
논문은 도로 위 차량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서로 통신하며 자율로 움직이는 CAV(Connected and Automated Vehicle), 그리고 통신은 되지만 사람이 직접 운전하는 CHV(Connected Human-driven Vehicle)입니다.
White Phase가 켜지면 CAV들이 일종의 “이동형 교통 제어기”처럼 동작합니다. 서로 주행 궤적을 공유하고 충돌하지 않게 조정하면서, 교차로의 신호 표시(백색·녹색 등)를 투표로 정합니다. 여러 후보안 중 가장 많이 선택된 안이 채택되는 방식입니다.
CHV, 즉 사람이 운전하는 차량에게 주어지는 규칙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앞차(CAV든 CHV든)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CAV 비율이 낮으면 White Phase는 켜지지 않습니다. 그때는 그냥 기존의 초록·노랑·빨강 방식으로 되돌아갑니다.
여기서 확인해두고 싶었던 게 하나 있습니다. 논문은 “차량이 투표해서 신호 표시를 정한다”고 설명하고, 뒤이어 나온 보행자 확장 연구(2024)에서도 “모델이 white·green 중 신호의 상태를 최적으로 선택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신호 표시 자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 표시를 누가, 어떻게 결정하느냐가 바뀌는 겁니다.
가장 먼저 걸린 곳 (맨 앞 차가 사람이라면)
기사를 읽자마자 든 의문은 이거였습니다.
“그거는 선두가 자율주행 차량이라는 가정이잖아.”
CHV의 규칙은 “앞차를 따라가면 된다”인데, 맨 앞에 선 차량에는 앞차가 없습니다. 기존 신호등에서는 사람이 초록불을 보고 출발 여부를 스스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하얀불은 “가라”도 “서라”도 아닙니다.
“하얀불인데 언제 출발할 거?”
누나는 다르게 봤습니다. 자율주행차가 이미 신호등과도 통신하고 있으니, 인간 차량은 그냥 그 판단을 따라가면 된다는 논리였습니다.
“자율주행차라고 걍 신호 무시하고 가는 게 아니라, 자율주행차는 그냥 교통시스템에 편입해서 같이 가는 거라니까.”
문제는 그 “판단”이 최선두 차량이 사람일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달되는지, 기사 수준의 설명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논문 원문의 투표·합의 과정은 상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맨 앞 차량이 사람일 때 그 차량이 무엇을 보고 언제 출발하는가”를 짚어주는 부분은 검색으로 확인한 자료 안에서 찾지 못했습니다. 논문이 이 상황을 처리하지 못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뉴스 기사나 논문 초록 수준의 설명만으로는 이 규칙이 드러나지 않아 의문이 남는다는 정도로 정리하는 게 정확할 것 같습니다.
교차로 전체로 넓혀보면
두 번째 의문은 교차로 전체의 흐름 전환이었습니다.
왕복 4차선 사거리를 생각해봅니다. 동서 방향이 통행 중이고 남북 방향은 대기 중입니다.
“그럼 동서만 통행 중일 때 남북에서는 대기하고 있는 차량이 있을 것이고, 그 가장 앞에 차량이 인간운전자일 때 언제 어떻게 끊어야 하는가.”
누나의 답은 “그건 알아서 조절될 거니까”였습니다. 자율주행차가 신호등과도 통신하니, 일정 기간 한쪽이 지나가면 다른 쪽을 열어주는 식으로 처리된다는 논리입니다. 실제로 기사에도 “교차로에 접근하는 차량 중 사람이 운전하는 차가 너무 많아지면 신호등이 기존의 초록·노랑·빨강 패턴으로 전환된다”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환이 언제, 어떤 기준으로 일어나는지는 기사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도 같은 방식으로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 수준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과, 논문이 이 문제를 못 풀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니까요.
”충분한 자율주행차”는 몇 대인가
기사는 White Phase가 “충분한 수의 자율주행차가 교차로에 접근하면” 켜진다고 설명합니다. 정확한 기준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기사 본문에 이걸 적용하는 곳에 대한 기준에 대해서 교통량 이런 언급은 없는 거 맞아?” “없지.”
이 지점에서 조심해야 할 게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AI에게 물어봤는데, 한쪽은 “40.2%~98.9%”, 다른 쪽은 “94% 대기시간 감소” 같은 수치를 던졌습니다. 논문을 검색해서 확인해보니 두 수치 모두 근거는 있었습니다. 다만 정확한 의미는 서로 다릅니다.
“40.2%~98.9%“는 기존의 완전 감응 신호 제어 방식과 비교했을 때, 다양한 교통량과 CAV 비율 조건에서 나온 지연시간 감소 폭의 범위입니다. 고정된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편차가 큰 범위라는 게 핵심입니다.
반대로 “White Phase를 몇 %의 CAV 비율에서 켠다”는 구체적인 활성화 기준은, 검색으로 확인한 자료들에서 명시적으로 공개된 하나의 숫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낮은 CAV 비율에서는 켜지지 않는다”는 조건만 확인됐고, 그 경계선이 정확히 몇 %인지는 특정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CAV가 30~40%면 켜진다”는 식의 문장은, 검증되지 않은 이상 이 글에서도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감응신호를 AI로 강화하면 안 되나
여기서부터가 이번 대화의 진짜 논쟁거리였습니다.
지금도 감응신호는 존재합니다. 도로의 차량이나 보행자를 센서·카메라로 감지하고, 교통 상황에 맞춰 신호 시간을 조정하는 방식입니다.
“신호등하고 거리의 차량하고 소통이 되면 굳이 하얀 신호를 추가할 필요가 있나? 그냥 도로 상황 보고 초록 빨강 노랑으로 열어주면 되는 거?”
이건 허술한 질문이 아닙니다. 자율주행차와 인프라가 통신할 수 있는 시대가 된다면, 왜 기존 신호체계를 AI로 고도화하는 대신 완전히 새로운 상태를 하나 더 만들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니까요.
누나의 반론은 결정권이 있는 위치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감응신호: 결정권이 여전히 인프라(신호 컨트롤러)에 있습니다. 센서가 정보를 모아서 신호기에 전달하면, 신호기가 ‘이번엔 이 방향 초록불을 몇 초 줄게’라고 정해줍니다.”
“화이트라이트: 아예 결정권을 인프라에서 차량들로 넘겨버립니다. 신호기는 ‘너네끼리 알아서 순서 정해’라고 선언하고 빠지는 거고, 실제 순서 조율은 차량 간 무선통신(V2V)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설명에서 “신호기가 완전히 빠진다”는 표현은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앞서 찾은 논문 구조를 보면 신호 표시(백색·녹색) 자체는 여전히 존재하고, 그걸 정하는 방식이 투표 기반 합의로 바뀌는 것에 가깝습니다. “신호라는 개념이 통째로 없어진다”기보다는, “신호를 누가 결정하느냐”의 구조가 인프라 단일 주체에서 차량들의 분산 합의로 옮겨간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감응신호를 “그냥 AI로 강화한 것”과 White Phase가 같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감응신호는 아무리 고도화되어도 결정 지점이 하나(신호 제어기)입니다. White Phase는 결정에 참여하는 주체 수가 교차로에 진입하는 CAV 수만큼 늘어나고, 그 사이의 합의 과정 자체가 시스템의 일부가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얼마나 똑똑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판단이 어디서 이루어지는가”의 구조 문제입니다.
새로운 프로세스가 추가된다는 것의 의미
“하얀불 프로세스가 신규 프로세스 추가인 건데?”
이 발언을 “새 신호 색깔이 싫다”는 취향의 문제로 읽으면 안 됩니다. 실제로 하려던 말은 “새로운 상태를 하나 추가하는 것 자체가 비용”이라는 개발자 관점이었습니다.
새로운 상태가 시스템에 생기면, 그 상태 하나만 딸려 오는 게 아닙니다.
- 진입 조건과 종료 조건
- 예외 상황과 장애 상황 처리
- 통신 실패·센서 오류 시의 동작
- 차량 간 합의가 실패했을 때의 처리
- 비정상 동작을 하는 차량에 대한 대응
- 기존 방식으로의 fallback 경로
- 운영·모니터링 방법
- 사고 발생 시 책임소재
- 새로 늘어난 테스트 케이스
기존 감응신호를 AI로 강화하는 쪽은 이미 있는 파이프라인(센서 → 중앙 판단 → 신호 배정) 안에서 판단 정확도만 올리는 일입니다. White Phase는 그 파이프라인 자체를 하나 더 만드는 일이고, 새 파이프라인에는 위 목록이 통째로 따라옵니다. “왜 새로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정확히는 “이 비용을 감수할 만한가”라는 질문이었던 셈입니다.
AI라고 규칙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대화 후반에는 AI 학습 방식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규칙을 주고 개발이 쉽지.” “룰 없이 무조건 좋은 쪽의 학습은 학습 자체가 어려워.”
이걸 “AI는 명확한 규칙 없이는 절대 학습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명제로 읽으면 과장입니다. 강화학습에는 보상을 잘 설계하고 제약조건을 주는 방식이 있고, rule-based safety layer나 constraint-based planning처럼 규칙과 학습을 함께 쓰는 접근도 이미 널리 쓰입니다.
다만 개발자 관점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더 좁은 이야기였습니다. “센서 값 → 중앙에서 계산 → 신호 배정”처럼 파이프라인이 하나로 고정된 시스템은 디버깅하기 쉽고 결과를 예측하기 쉽습니다. 반면 차량들이 서로 순서를 협상하는 구조는 조율해야 할 변수(차량 수, 속도, 방향의 조합)가 참여자 수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잘 조율됐다”는 상태 자체를 정의하기가 애매해집니다. 안전 규칙, 제약조건, fallback 경로 같은 시스템 경계를 명확히 그어두지 않으면, “AI가 알아서 최선을 찾는다”는 말은 안전-critical한 시스템에서는 검증하기 어려운 말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다르게 봤을까
여기까지 왔을 때, 서로 상대방의 말을 이해 못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각자 AI에게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미리 맞춘 건 아니었는데, 비슷한 타이밍에 서로 다른 LLM에게 같은 상황을 던져봤습니다. 나는 GPT에게, 누나는 Claude에게. 완전히 다른 입장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AI에게 물었는데도, 돌아온 답은 비슷했습니다. 둘의 관점 자체가 다르다는 진단이었습니다.
“우리가 왜 달랐는지 알았다. 나는 기획자 입장이고 너는 개발자인가봄. 재밌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 나는 제작자 입장이고 누나는 사용자 입장임.”
“예스, 난 길 빠른 게 좋음. 기획 할 땐 유저들의 행동을 본다구.”
“우리는 일단 사용자들이 복잡하면 빠져나가서 걔네가 뭔가 판단하게 하는 걸 최대한 줄이려함. 스텝 하나를 위해 돈 쓰기? 가능.”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누나는 “이걸 쓰는 사람이 얼마나 편해지는가”에서 시작했고, 나는 “이걸 만드는 사람이 얼마나 감당해야 하는가”에서 시작했습니다. 같은 기술을 보면서도 먼저 눈에 들어오는 실패 시나리오와 편익이 서로 달랐던 겁니다.
사용자의 비용, 제작자의 비용
개발자가 계산하는 비용은 비교적 손에 잡힙니다. 개발 인력, 서버, 통신 인프라, 유지보수, 장애 대응, 보안, 테스트, 운영 인력, 시스템 복잡도. 숫자로 만들기 쉬운 항목들입니다.
기획자가 계산하는 비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용자의 판단 부담, 인지 비용, 혼란, 학습 비용, 시스템을 못 믿어서 이탈하는 비용. “사용자 인지 비용 100만 원”이라고 바로 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비용이 아닌 건 아닙니다. 실제 서비스에서는 전환율, 이탈률, 평균 처리시간, 만족도 같은 관측 가능한 지표로 간접적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White Phase를 이 틀로 다시 보면, 개발자는 “새로운 교통 제어 프로토콜의 복잡성”을 보고, 기획자는 “인간 운전자가 복잡한 판단을 직접 하지 않아도 되는 편익”을 봅니다. 결국 이 논쟁은 “어떤 비용을 비용으로 셀 것인가”의 문제로도 연결됩니다.
실제 프로젝트였다면 물어야 할 질문
이번 대화는 남매끼리 자유롭게 주고받은 거라 결론 없이 끝나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실제 국가 교통 인프라 사업이었다면, 논쟁의 모양 자체가 달라졌을 겁니다.
개발자·인프라 엔지니어 쪽은 구축 비용, 통신 인프라, 장애 대응, 보안, 차량 인증, 프로토콜 표준화, 책임소재, 시스템 안정성을 제시해야 합니다. 기획자·교통공학자 쪽은 평균 통행시간, 교차로 처리량, 대기행렬, 인간 운전자의 인지부담, 사고율, 사회적 편익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질문의 형태가 바뀝니다. “White Phase가 필요한가?”에서 “어떤 조건에서 White Phase가 기존 방식보다 우월한가?”로요.
CAV 비율이 어느 수준 이상이어야 유리한가. 통신 지연·패킷 손실이 어느 수준까지 허용되는가. 인간 운전자 비율이 어느 정도면 기존 방식으로 fallback해야 하는가. 기존 감응신호 대비 지연시간이 얼마나 줄어야 도입할 가치가 있는가. 장애 발생 시 기존 신호체계로 얼마나 빠르게 복귀할 수 있는가.
이렇게 바뀌는 순간, 각자 자기 철학을 주장하는 논쟁이 아니라 KPI와 조건을 놓고 검증하는 문제가 됩니다.
결국 남는 질문
처음 질문은 “감응신호를 AI로 강화하면 되지 않나?”였습니다. 조금 더 들여다보니, White Phase는 신호 최적화가 아니라 교통 제어의 의사결정 주체를 인프라에서 차량으로 분산시키려는 시도였고, 그 지점에서 기존 감응신호와 구조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글에서 White Phase 자체는 미끼에 가깝습니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같은 주제를 두고 벌어지는 관점의 차이 쪽입니다.
같은 주제를 놓고 의견이 갈리는 일은 흔합니다. 이번 경우만 봐도 White Phase를 실제로 도입하려면 CAV 비율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통신이 끊기거나 지연될 때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인간 운전자가 섞였을 때 어디까지 기존 방식으로 되돌릴지, 감응신호 대비 실제로 얼마나 나아지는지, 그 개선 폭이 새 시스템을 운영하는 비용을 감당할 만한지. 판단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뭔가를 논의할 때 두고두고 떠올릴 만한 짧은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과정 없이 혼자 고민하고 넘어갔던 것들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겠네요.